2015. 11. 21. 13:52ㆍ국내여행 이야기/수도권 여행
2015년 11월 21일
주말을 맞아 집에서 멀지않은 곳에 있는 세계문화유산 융·건릉을 방문했다.
요며칠 궂은 날씨가 계속되더니 오늘은 모처럼 날씨도 화창했다.
이곳은 조선 정조(正祖)의 아버지이자 사도세자로 알려진 조선 장조(莊祖)와 혜경궁 홍씨로 알려진 헌경의황후가 모셔진 융릉(隆陵)과 정조와 효의황후의 합장릉인 건릉(健陵)이 있는 곳이다.
융릉·건릉 입구
오전 10시, 이른 시간인데도 학생등 단체 손님들이 많이 보였다.
종합 안내도, 오른쪽이 사도세자 능인 융릉이고, 왼쪽이 정조의 능인 건릉이다.
출입구 왼쪽에 있는 역사문화관, 사도세자와 정조시대의 문화적인 배경을 자세히 설명해 놓았으며,
문화 해설가의 상세한 해설도 들을 수 있었다.
110년 되었다는 멋진 향나무
조금 올라가면 융릉과 건능이 갈라지는 삼거리가 나온다.
우선 오른쪽 융릉으로 향했다.
소나무 숲 사이로 길이 나 있었다.
참나무 밭에는 떨어진 낙옆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드디어 융릉이 보인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향하고 있었다.
융릉 조금 못미처 왼편에 있는 원형 연못, 곤신지(坤申池)
융릉이 천장된 이듬해 1790년 조성되었으며, 융릉의 생방(生方:풍수지리 용어로 묘지에서 처음 보이는 물을 지칭)으로 이곳이 좋은곳(吉地)이기 때문에 판 연못이라고 한다.
어느 아파트 단지에서 역사문화 탐방으로 온 일행들이 열심히 해설가의 설명을 듣고 있다.
융릉 전경,
사도세자로 알려진 장조(莊祖,1735~1762)와 혜경궁으로 알려진 헌경황후 홍씨(1735~1815)의 합장릉이다.
소론계 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운 사도세자는 노론과의 갈등을 일으키다가 1762년 뒤주에 갇혀 죽게 되는데,
1776년 왕위에 오른 아들 정조는 사도세자를 장현세자로 추숭하고, 1789년 당시 양주에 있던 영우원을 이곳으로 옮겨 와 현릉원이라 하였다.
이후 1899년 고종이 장현세자를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혜경궁을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추존하고, 현릉원을 융릉으로 높였다.
해설가의 설명을 고사리같은 손으로 필기하고 있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꽤나 진지하다.
입구 홍전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폭 3미터의 돌길인 참도(參道),
가운데 길이 신이 다니는 신도(神道)이며 조금 낮게 만들어진 오른편이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이다.
정자각(丁字閣), 제사를 모시는 건물로 제향공간의 중심적 건물이다.
두개가 합쳐진 모양이 '정(丁)자'같다 하여 정자각이라 부른다고 한다.
정자각을 옆에서 본 모습
융릉이다.
가까이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조선 왕릉 40기중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데,
가까이 가 볼 수 없어서 조금 섭섭...
오른편에 있는 비각(碑閣)
비석과 신도비가 있다.
해설가 설명을 옆에서 들으니 신이 다니는 신도(神道)를 걷지 말고 어도(御道)로 다니란다.
정자각 서남측에 있는 수라간이다. 제례를 지낼 때 음식을 차리거나 데우는 건물이다.
나오면서 홍전문(紅箭門)앞에서 인증 샷,
돌아올 때 보니 인근 대학의 학생들이 낙옆 치우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바싹 마른 낙옆으로 인한 불의의 화재로 소중한 문화유산을 잃어버리는 일을 막기 위함이다.
반대편에 있는 건릉으로 향했다.
역시 소나무 밭길을 지나 울창한 참나무 밭길이 이어졌다.
건릉이다.
조선 22대 임금 정조(正祖,1752~1800)와 효의황후 김씨(1753~1821)의 합장릉이다.
1899년 고종이 정조를 정조선황제(正祖宣皇帝)로,효의왕후를 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로 추존했다.
정자각과 참도, 아버지 능인 융릉과 배치나 모양이 똑같았다.
비각은 크기가 작았으며 안에 비석도 한개만 있었다.
역시 능 가까이는 접근할 수 없었으며...
건릉의 아름다움은 융릉에 비해 떨어진다고 한다.
문화 융성기인 정조 때 만들어진 융릉은 조선 왕릉 중 가장 아름다운 반면, 쇠퇴기에 조성된 건릉은 그보다 예술적으로 떨어진다고...
왕릉을 보면 그 왕릉이 조성된 시기의 문화 발전 수준을 알 수 있다는 게 해설가의 설명이다.
돌아올 때는 산길로 난 산책로로 왔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수북이 쌓여 있는 낙옆을 밟는 여유를 느꼈다.
멋진 소나무밭 사이 산책길을 걸어 나왔다.
어린아이를 동반한 한 가족이 걷고 있었다.
입구에 있는 재실,
재실은 왕릉의 제사와 감시를 담당했는데 지금은 융건릉 관리소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나오는 길에 다시 역사문화관에 들렸는데 마침 해설가의 해설이 진행되고 있어 한동안 역사 공부 좀 하고 왔다.
비운에 간 사도세자의 얘기와 효심 가득한 정조가 노론 세력의 반대를 무릎쓰고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묘를 천하의 명당인 이곳으로 옮긴 일,
그리고 규장각 설치등 정조의 치적들...
그러나 1800년 46세로 단명하는 바람에 그 개혁정치가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마침내 세도정치로 이어지고 국운은 기울고...
그리고 200여년 전 사도세자를 이곳 융릉으로 모시기 전에는 이곳이 현재 수원,오산,화성시를 합한 수원부(水原府)의 중심이었다는 얘기.
왕릉이 조성되면 사방 10리 이내에는 사람이 거주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곳에 있던 토성,관아 등을 황무지인 수원으로 이전을 했고 그것이 수원 화성 조성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이때 정약용이 등장하고...
흥미로운 역사 해설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역사에 빠진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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